[데스크칼럼] “배가 서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김경탁 / 기사승인 : 2021-08-06 12:02:49
  • -
  • +
  • 인쇄


[토요경제=김경탁 기자]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 크고 탄탄한 회사에서 연봉 2.5배를 준다며 오라고 하면 어떨까?


세계 2위 해운회사인 MSC가 지난 7월 초 발표한 한국인 선원 채용공고에서 제시한 연봉 수준이 국내 유일의 초대형 컨테이너 원양선사인 HMM 선원들이 기존에 받고 있는 금액의 2.5배(일등항해사 기준) 정도라는 소식이 화제였다.


초대형 컨테이너선(1만TEU 이상급) 탑승 경력이 있는 한국인 선원·조리장·조리원 등을 대상으로 했던 이 채용공고는 이틀 만에 마감됐다고 한다.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운용하는 국내 선사가 HMM 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상 전원 HMM 출신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위스 국적선사인 MSC는 올해 상반기 컨테이너 선복량을 가장 많이 늘린 선사로 집계된 바 있다.


같은 조사에서 2위는 HMM이었는데, 올해 상반기까지 세계 컨테이너선 발주량만으로 최근 5년간 연간 발주량을 넘어선 것을 보면 당분간 국제선사간 인력쟁탈전이 이어질 전망이다.


10여년 전 쯤부터 외국항공사들이 한국인 파일럿들을 빼가서 난리 났던 일이 기억나는데, 그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만성적인 인력부족의 악순환에 빠져있는 간호사 인력 수급 문제를 떠올리게 할 정도이다.


MSC에서 제시한 임금 수준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국내선사들과 외국선사들 사이에 임금 격차가 커진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다.


그나마 선원법에 의해 2015년부터 고시된 ‘선원최저임금’ 제도 때문에 갑판원 같은 부원직급 선원들의 임금은 소폭이나마 꾸준히 상승해왔으나 항해사, 기관사 같은 사관급 선원들의 임금은 6년째 동결됐기 때문이다.


법정 최저임금이 201% 상승한 지난 10년 동안 선원최저임금은 82% 정도 상승에 그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2021년 현재 사관급 선원 중 막내와 부원직급 고참급 사이의 임금 격차가 1~2% 밖에 나지 않는 상황까지 왔다. 물가상승률에 따른 화폐가치 하락까지 감안하면 실질소득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계산이다.


HMM 해원노조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올해 6월까지 1년 반 사이 회사를 떠난 선원은 총 100명에 달한다.(2020년 61명, 2021년 상반기 38명). 총원 640여명의 해원 근로자 중에서 운항중인 배의 현재 승선인원이 500명 정도 되는데 승선인원의 20% 정도가 빠져나간 셈이다.


사람이 줄어들다보니 근무기간은 한정 없이 길어졌다. 정신건강 등을 감안해 정해진 미국의 법정 최대 승선기간이 4개월 가량인데, 그 2배인 8개월이 한번 배에 탔을 때의 최소승선 계약기간이 됐고, 대부분 반강제적으로 연장계약을 하게 된다. 부산항에 입항해도 ‘2주내 승선자가 있으면 접안불가’라는 중국항만당국 규제 때문에 하선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 긴 기간이 끝났다고 배에서 꼭 내릴 수 있느냐…. ‘대체인력이 없어 교대 불가’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라고 한다. 아이가 태어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마찬가지이다.


하선을 했다하더라도 회사가 요구하면 다시 배를 타야하는데, 통상 3~4주의 텀 중에 2주는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기간으로 보내야 한다.


최근 진행된 HMM의 해원노조 3차 임단협에서 노사 양측의 제시안은 다음과 같다.


사측 = △임금인상 5.5% 제시 △성과급 아닌 ‘격려금’ 100% △하반기에도 시황이 받쳐준다면, 연말에 100% 범위 내에서의 추가 ‘격려금’지급을 노동조합과 ‘협의’ 할 수 있음


노측 = △급여의 정상화 요구 △임금 25% 인상 △성과급 1200% 지급 △생수비 명목 $2/인/일 지원


‘2.5배’에 놀란 마음으로 양측의 요구를 보니 기가 막히고 짠한 기분이 든다. 오히려 초대형 컨선 도입을 준비중인 외국선사의 구인공고에 동요하는 선원들을 노조 요구안 정도로 진정시킬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속사정을 듣다보니 노측의 현재 요구안은 실제 요구가 아닌 협상용이라는 말도 나온다. 회사 측이 지난해 연말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에서 약속했던 내용조차 지키지 않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고 나와서 제시한 내용이라는 거다.


지난해 중노위 조정 과정에 회사 내부적으로 판단한 적정 수준이 11.8% 임금인상과 700% 성과급으로 알려졌고 올해는 실적이 더 좋아 그 이상을 기대했는데 뜬금없이 5.5%의 임금인상과 100%격려금 지급결정이라는 안이 나와서 실망을 넘어 분노하는 분위기가 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국내 2위 선사인 팬오션이 HMM보다 30% 높은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25% 인상안은 노조가 조합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마지노선에 가깝지 않겠나 하는 판단을 하게 된다.


임단협이 최종 결렬되면 파업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수출입 물류 마비에 따른 경제적 피해는 물론 선원 인력 유출은 더 거세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조 측은 “세계최대 컨테이너선사인 머스크(MAERSK)의 경우, 인건비가 수익에 차지하는 비율이 6.9%인 반면 HMM은 1.6%에 불과하고 현행에서 25%를 올린다 하더라도 1.9% 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번 요구가 결코 무리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HMM은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된 공적자금이 투입된 회사이고, 흑자를 보기 시작한지 이제 2년밖에 되지 않은 회사여서 사측이 노조에 제시할 수 있는 인상 폭의 ‘재량’에 한계가 있으리라는 사정은 예상이 가는 부분이다.


본지 취재에서 회사 측 관계자는 경영권을 온전히 회사가 갖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외부에서 바라본 HMM은 주채권은행이면서 24.99%의 지분을 가진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이하 산은)의 가이드라인을 벗어난 경영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게 전반적인 평가이다.


산은은 HMM으로부터 2047년 이후 만기인 2조6000억원 규모의 영구채에 연리 3%의 이자를 챙기고 있고 이 이자율은 내년부터는 6%로 높아질 예정이다. 지난달에는 30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해 2조4000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렸다.


그 덕분인지 산업은행은 지난 3일 10년 만에 처음으로 금융위원회의 국책은행 경영실적평가에서 최고등급을 받았다. 이를 자축하는 성과급 잔치를 벌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3차 협상에서 간극을 좁히지 못한 해원노조 전정근 위원장은 HMM 육상노조(사무직 노조) 김진만 위원장과 함께 4일 오후 청와대를 찾아가 시민사회수석실 관계자에게 “배가 서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전정근 위원장은 “대통령의 결단과 추진력의 결실인 해운 재건 계획으로 수출 대란은 물론 수출입기업 몰락도 막을 수 있었지만 그 해운 재건에는 선원이 없었다”며 “대통령이 ‘사람이 먼저다’라고 강조했는데 ‘배가 먼저다’라고 느껴지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현재 HMM 육상노조는 4차 협상이 결렬된 후 중앙노동위원회 쟁의조정을 신청한 상태다. 육상노조는 8년째 임금이 동결된 상태이다.


해원노조는 오는 11일 사측과 4차 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해원 노조도 4차 협상 결렬 시 중노위 조정을 신청할 계획이다.


두 노조는 중노위 조정에서도 소득이 없으면 HMM 사상 첫 파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지난 6월 29일 해운산업 리더 국가 실현전략 선포 및 1.6만TEU급 한울호 출항식에서 발언하는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저작권자ⓒ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