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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원 토요경제신문 상무 |
가난은 거창한 숫자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월세 하루, 병원비 한 번, 가게 냉장고 수리비, 아이 학원비, 밀린 전기요금 하나 때문에 무너진다. 은행 문턱은 높고 카드 한도는 막힌다. 가족에게 손 벌릴 곳도 없을 때 사람은 가장 위험한 문 앞에 선다. 대부업체와 사채의 문이다.
삼성이 그 문 앞에 설 수 있는 이들에게 2000억원을 풀기로 했다.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카드·삼성증권 등 금융 관계사가 삼성미소금융재단에 재원을 출연해 금융취약계층과 영세 자영업자에게 사업운영자금, 창업자금, 긴급생계자금을 지원한다. 대출은 무담보·무보증 방식이고, 금리는 연 4.5% 이하로 운영된다. 약 4만명이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숫자는 단순히 4만명이 아니다. 4만개의 가정이다. 이렇게 빌린 긴급생계비는 부모의 병원비가 되고, 아이의 밥값이 되고, 자영업자의 하루치 재료비가 되고, 직원 한 명의 월급이 된다. 긴급생계자금이라는 말은 차갑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현실이 들어 있다. 오늘 막히면 내일 무너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오늘을 살릴 작은 돈이다.
금융은 이상하게도 돈이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늦게 간다. 신용이 낮다는 이유로,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소득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제도권 금융은 문을 닫는다. 그 빈틈을 고금리 대부와 불법 사금융이 파고든다. 그래서 이번 삼성의 출연은 단순한 사회공헌이 아니다. 벼랑 끝에 선 사람을 제도권 금융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든든한 동아줄이 된다.
어느 골목 가게의 냉장고가 고장 났다고 생각해보자. 수리비는 몇백만원이다. 주인은 은행에 갔지만 거절당했다. 급한 마음에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렸다. 처음에는 냉장고만 고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자가 이자를 불렀고, 독촉은 일상을 무너뜨렸다. 결국 가게 문을 닫았다. 냉장고 하나가 가게 하나와 가정 하나를 무너뜨린 것이다.
반대로 그 순간 낮은 금리의 긴급자금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수 있다. 냉장고는 고쳐지고, 가게는 하루 더 문을 열고, 직원은 일자리를 지키고, 아이는 부모의 폐업을 보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금융의 선한 나비효과다. 작은 돈이 한 가정을 지키고, 한 가정이 무너지지 않으면 사회의 그늘도 조금씩 줄어든다.
성공한 기업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돈을 많이 번 기업이 박수받는 시대는 지났다. 많이 번 돈이 어디로 흐르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삼성의 2000억원 출연은 기업의 성과가 사회의 약한 고리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최근 대기업들의 상생 움직임도 같은 흐름에서 봐야 한다. 삼성은 앞서 6700개 협력사와 상생협약을 맺고 자금·기술·인력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LG도 1·2·3차 협력사 상생협약을 통해 2차 이하 협력사에 900억원 규모 금융지원을 확대하고 상생결제 낙수율을 높이기로 했다. 대기업의 힘을 본사 안에만 묶어두지 않고 협력사와 취약계층으로 흘려보내는 흐름이다.
물론 이런 조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2000억원도 한계가 있고, 4만명도 전체 금융취약계층에 비하면 일부다. 중요한 것은 실행이다. 실제 필요한 사람에게 돈이 가는지, 서류 문턱이 또 다른 장벽이 되지 않는지, 긴급생계자금이 제때 집행되는지 봐야 한다. 좋은 제도도 현장에서 늦으면 힘을 잃는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는 이름의 무게가 나온다. 명단에 오른 이름 하나가 한 사람의 생사를 갈랐다. 물론 삼성의 포용금융을 그 비극의 역사와 직접 견줄 수는 없다. 다만 이번 4만명의 명단이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기회를 주는 이름표가 될 수 있다. 그 명단은 회계장부의 숫자가 아니라 벼랑 끝에서 돌아선 사람들의 기록이 될 수 있다.
언젠가 이 지원을 받은 4만명 가운데 누군가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닫으려던 가게를 살리고, 무너질 뻔한 가정을 지키고, 아이에게 다른 내일을 보여줄 것이다. 그중 누군가는 훗날 더 큰 성공을 거둬 자신이 받은 기회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줄지도 모른다. 삼성의 2000억원이 만든 이 시대의 '삼성 리스트'가 언젠가 또 다른 행복의 리스트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성공한 기업이 나아갈 길은 여기에 있다. 성장의 과실을 사회의 가장 약한 곳으로 흘려보내는 기업, 절망의 명단을 희망의 명단으로 바꾸는 기업, 그리고 그 희망이 다시 사회환원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기업. 그런 기업이 오래 박수받는다.
토요경제 / 김승원 ksw90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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