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
1950-60년대 한식과 양식의 총성없는 전쟁 '서울의식당'
사람은 먹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먹는다.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이 있다. 사람은 먹어야 한다. 때가되면 배가 고파진다. 먹으려면 장소가 필요하다. 앉아서 편히 먹어야 한다. 물론 아무데서고 먹을 수 있다. 서서 먹을 수 있다. 누워서 먹을 수도 있다. 이런 특별한 경우는 정상이 아니다.
생활의 대부분은 밖에서 이루어진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는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식당이다. 복잡한 도시에서는 식당이 큰 역할을 한다. 서울은 큰 도시다.
서울에는 언제 식당이 생겼을까. 1900년대 초에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며 크게 발달했다. 종류가 다양해졌다. 한식당, 양식당, 중식당이 문을 열었다. 전문 식당도 생겼다.
지역 특성에 맞는 음식을 선 보였다. 서울에는 오래 된 식당이 많다. 손님 사랑을 많이 았다. 음식만 내놓는 것이 아니었다. 정도 함께 주었다. 없어진 식당도 있다. 다시는 못 느낄 정만 남겨놓은 채.
술꾼의 친구 '청진동 해장국 - 청진옥·흥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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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진옥 <사진=김병윤 대기자> |
청진동 하면 해장국이 떠오른다. 동네 이름보다 해장국으로 유명하다. 서울의 술꾼이 모여들었다. 청진동 해장국을 먹으려고. 흥진옥과 청진옥이 유명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 청진옥의 효시는 흥진옥이다. 흥진옥의 주인은 최창익이었다. 큰아들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
청진옥은 동생이 운영한다. 최창혁이다. 형제가 해장국집으로 성공했다. 흥진옥과 청진옥은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 예전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두 가게는 특유의 조리법을 선 보였다. 선지를 재료로 썼다. 선지는 소피로 만든다. 소피를 고체 상태로 굳힌다. 소피를 굳히는 기술이 비법이다.
두 식당은 자신만의 비법으로 해장국을 만들었다. 선지해장국이다. 선지에 우거지를 넣어 시원한 맛을 냈다. 애주가들은 선지해장국에 빠져 들었다. 선지가 대중화됐다. 시원한 국물. 선지의 부드러운 식감. 맛과 영양을 겸비했다.
술꾼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해장에는 청진동 해장국이 최고라고.
흥진옥과 청진옥은 동네 덕도 톡톡히 봤다. 예전에 공사가 많았다. 도시개발계획이 진행됐다. 건설 붐이 일어났다. 건물이 들어섰다. 근로자가 모여 들었다. 돈이 많이 풀렸다. 힘든 노동이 끝나면 한잔 술을 걸쳤다. 근로자들의 즐거움이자 피로회복제였다. 마무리는 해장국이었다. 내일을 준비하는 활력소였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청진동 주변에는 술집이 많았다. 나이트클럽이 모여 있었다. 나이트클럽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새벽 4시까지 나올 수가 없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고 놀았다.
속이 쓰렸다. 배도 고팠다. 통행금지가 풀리면 벌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숙취도 해소해야 했다. 모이는 장소가 청진동이었다. 흥진옥은 술꾼의 욕구를 채워줬다. 청진옥도 마찬가지였다. 애주가는 해장술로 2차를 즐겼다. 새로운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근처에 선술집이 생겼다. 포장마차의 시초다.
여주인의 인심이 넉넉했던 '한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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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관<사진=김병윤 대기자> |
오래 된 식당이다. 1939년에 문을 열었다. 종로에서 시작했다. 종각 건너편에 있었다. 지금은 압구정동에 본점이 있다. 분점도 여러 곳이 있다. 80년의 전통을 갖고 있다. 초창기에는 갈비와 냉면을 팔았다.
지금은 여러 종류를 판다. 갈비는 비싼 음식이다. 당시에도 비쌌다. 주인은 생각을 바꿔 싸게 팔았다. 사람이 줄을 섰다. 인산인해였다. 갈비를 싸게 먹을 수 있어서. 식당을 나올 때 뿌듯함을 느꼈다. 이쑤시개 한 개를 입에 물고 폼을 잡았다.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 먹은 사람 모두가 부자였다.
주인이 대단했다. 몸뻬 아줌마라 불렀다. 언제나 일복 바지를 입은 촌부의 모습이었다. 여장부였다.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 일화가 있다. 11시에 영업이 끝났다. 1950~60년대 화폐가치가 없었다. 돈의 부피가 상상 못 할 정도였다. 셀 수도 없었다. 돈을 마대자루에 쓸어 담았다. 1~2개가 아니었다. 옮길 수가 없었다. 지프차로 옮겼다. 집에서 하루를 보관했다. 가게를 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은행 문이 열릴 때 입금을 시켰다.
이런 날이 계속 반복됐다. 한일관의 창업주는 검소했다. 돈 있는 티를 안냈다. 손님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손님만이 아니다. 사회에 좋은 일도 많이 했다. 지금도 주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푸근한 인상. 넉넉한 마음씨. 순박한 웃음. 손님의 벗이었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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