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태량, '예술성에 대한 헛소리(The drivel on the artistry)', 2026, Oil on canvas, 333.3×197cm. [갤러리그림손] |
“내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
화업 30년을 넘긴 작가가 자신의 그림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림을 부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철학과 이념을 앞세우기보다 화면에 남은 형태와 선, 색 자체로 관객과 만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한국 추상표현주의 작가 이태량의 56번째 개인전 '가볍게 처절하게'는 이 문장에서 출발한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500호 대작을 비롯해 20~200호 규모의 최근작 20여 점이 나왔다. 지난해 화업 30주년 회고전 이후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이태량의 화면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작가는 먼저 검은 목탄으로 거침없이 선을 긋는다. 그 위를 유화물감으로 덮고, 다시 굳은 표면에 검은 스크래치를 낸다. 그리고 또 지운다. 그리는 일과 지우는 일이 한 화면 안에서 반복된다.
목탄과 유화물감은 서로 다른 성질을 지녔다. 목탄은 손으로 문지르면 쉽게 번지고 사라지는 재료다. 반대로 유화물감은 화면을 두껍게 덮고 오래 남는다. 이태량은 지난 30년 동안 이 두 재료를 한 화면 안에서 부딪치게 했다. 그 충돌 속에서 선은 생기고, 묻히고, 다시 표면으로 올라온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완성된 형태보다 흔적이 중요하다. 처음 그었던 선은 물감 아래로 사라지지만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지워진 자리 위에 새로운 선이 생기고, 덮인 표면은 다시 긁힌다. 화면은 무엇인가를 명확히 보여주기보다 생성과 소멸의 시간을 품는다.
| ▲ 이태량, '지워진 생각(Erased Thought)', 2026, Oil on canvas, 90.9×65.1cm. [갤러리그림손] |
이 방식은 1995년 첫 개인전 이후 이어진 작업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작가는 '존재와 사고', '명제형식', '무경산수'를 거쳐 2023년부터 '헤르메틱'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업의 이름과 시기는 달라졌지만, 화면을 통해 묻고 스스로 만든 답을 다시 의심하는 태도는 계속된다.
전시 제목 '가볍게 처절하게'도 그 연장선에 있다. 가벼움과 처절함은 쉽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러나 이태량의 화면에서는 두 감각이 동시에 작동한다. 목탄의 선은 망설임 없이 지나간다. 얼핏 즉흥적이고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그 선을 그리고 덮고 다시 긁어낸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다. 화면 뒤에는 수없이 반복한 노동과 집요한 시간이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의 문장을 던진다.
“가치가 그림으로 들어가는 순간, 가치는 가치 없는 것이 된다.”
이 말은 작가가 관객에게 정해진 해석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태량은 그림 안에 특정 철학이나 이념을 심어두고 그것을 찾아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희망과 사랑, 기쁨과 고통, 좌절과 한계가 화면에서 스스로 드러나 관객에게 닿기를 바란다.
| ▲ 이태량, '인스턴트 꿈(Instant dream)', 2026, Oil on canvas, 90.9×72.7cm. [갤러리그림손] |
“내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그림의 무가치를 말하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정해놓은 의미가 아니라, 관객이 그림 앞에서 무엇을 느끼고 자신의 삶으로 무엇을 가져가는가에 있다는 뜻에 가깝다. 그가 “정작 중요한 것은 내 그림 밖의 모든 것들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추상회화 앞에서 관객은 종종 난감해진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으면 작가의 설명부터 찾는다. 제목과 평론을 읽고 그 안에서 정답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이태량은 그 정답을 걷어낸다. 목탄으로 그었다가 지워진 선, 유화물감 아래 묻힌 흔적, 다시 표면을 가른 검은 스크래치 앞에서 관객은 작가의 해석보다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수십년 그림을 그린 작가는 이제 자신의 그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 위해 그는 여전히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선다. 목탄을 긋고, 물감을 덮고, 다시 지운다.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그림을 그리는 것. 그 모순 사이에 이태량의 '가볍게 처절하게'가 있다.
이태량의 56번째 개인전 '가볍게 처절하게'는 9월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 갤러리그림손에서 열린다. 오프닝은 8월 28일 오후 3시다.
토요경제 / 마리아김 문화전문기자 kimjjyy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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