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추천도서]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

이완재 / 기사승인 : 2013-06-17 15: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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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김용복, 이승원, 이광일, 박영균 저, 410쪽, 2만9000원, 소명출판


지금의 한국 사회는 헌법으로 민주주의를 보장하고 있지만, 민주주의가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민주주의가 ‘타는 목마름’으로 가슴속에 새겨져있던 시절을 겪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에 남의 눈을 피해서도 ‘떨리는 손’으로 ‘숨죽여 흐느끼며’ 써야 했지만, 87년 이후 ‘민주주의’는 더 이상 남몰래 품어야 하는 꿈이나 이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이제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이념이자 제도이며 운동으로 받아들여지며, 보수든 진보든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 흘러넘치는 ‘민주주의’는 과연 우리가 꿈꾸고 갈구하던 그 모습 그대로인가? 87년 6월 항쟁 이후 유례없이 짧은 기간에 비약적으로 성취된 ‘민주주의’는 오히려 우리가 원한 것은 이것이 아니라는 의혹과 실망만을 안겨주었고,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사회가 성취한 민주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 사이에서 중요한 논쟁의 지점을 제시한 것이 바로 최장집이다.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말을 통해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최장집의 민주주의론과 그 한계
한국 민주주의에 관한 새로운 담론과 이론적 모델, 제도적 전망을 모색하는 연구를 하는 ‘도래할 한국 민주주의’ 기획연구팀의 글을 묶은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은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의 주요 논점인 정당정치 및 정치개혁과 관련하여 그동안 최장집에게 제기된 비판과 쟁점들을 고찰하면서 시작한다. 이는 이 책에서 제기하는 ‘최장집 논쟁’의 전체적인 구도를 밝히는 것으로 최장집의 정당개혁 필요성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거시적 접근으로 인한 한계를 지적한다.

이에 이어 이승원은 현대 민주주의가 정당체제를 통해 작동한다는 최장집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최장집의 주장이 정치의 영역과 주체의 범위를 제약하며, 정당체제의 발전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형태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절차들을 준수하며 합의에 도달하는 시간을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삶의 문제에 직면한 이들이 ‘정당정치의 희생자’로 배제되는 과정에 주목하며 정당정치의 환상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이광일은 최장집의 노동운동 연구와 담론에 관한 최장집의 주요 저술과 논문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하여 최장집의 대표적 논점인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실체와 그 한계를 밝히고, 우리 사회의 급진 정치학의 이론적 빈곤함까지 지적한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제기되는데, 최장집이 자본주의와 결부된 대의제의 일반적인 위기를 한국적 특수성으로 간주하면서도 그 대안으로는 정당민주주의에 대한 일반론을 제시한다는 점을 들어, 최장집이 정당체제를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힘과 동력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을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과 비교한 진태원의 글은 매우 독특하며 흥미롭다. 진태원은 최장집과 발리바르가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문제설정을 공유하면서, 민주주의를 완성될 수 있는 형식적 틀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선하고 보완하거나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역동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최장집이 초역사적 보편성을 갖는 메타민주주의 모형으로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고집하는 데 반해,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의 틀 자체가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민주주의 자체의 혁명적 변화 가능성을 승인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가리키는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는 점을 밝혀낸 이 글은 최장집 이론의 장단점을 비교사상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새로운 길
‘최장집 논쟁’은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에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장된다. 고병권은 최장집을 통해 주권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최장집은 촛불집회와 같은 여러 형태의 ‘운동’을 민주주의의 실패로 보았는데, 고병권은 정반대로 이러한 운동이 민주주의의 새로운 얼굴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해석의 차이가 ‘민주주의’ 자체가 모두에게 ‘다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운동’들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생각하며, 대의기구가 사회적 갈등을 충분히 대의하지 못 하는 이유가 대의제의 미완성 때문이라는 최장집의 주장과 달리, 고병권은 대의제 자체가 인민들의 정치적 개입을 방지하기 위한 체제이며, 정당이라는 대의제도를 벗어나 데모스의 힘과 능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새로 정의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의 한계를 밝히며 마무리된다. 최장집의 ‘민중’에서 ‘시민’으로의 용어 변화가 ‘국민국가-산업화-민주화’라는 역사의 보편적 모델을 상정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만을 절대화하고 이상화하는 한계를 드러낸다고 주장과, ‘민주주의의 탈민주화’ 시대에 최장집의 민주화 기획이 유효성을 상실했으며, ‘최장집 논쟁’이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을 분리시켜 사고하는 경향을 강화했다는 지적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앞으로의 더 깊은 논의를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비어있는 민주주의
최장집이 안철수 의원의 싱크탱크인 ‘정책 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을 맡게 되면서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에 대한 관심과 함께, 최장집이 내놓을 새로운 ‘민주화 기획’에 대한 궁금증도 일고 있다. 여전히 활발한 지적 활동에 임하고 있는 ‘살아 있는 학자’의 이름을 토론과 논쟁의 무대에 올리는 일은 예외적일 뿐 아니라 적지 않은 부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인 최장집이 제시한 담론의 성과와 한계를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은 한국 민주주의 연구를 심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책의 필자들은 그동안 대의민주주의와 정당정치로만 표상되었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하며 대의제와 선거제, 정당정치 외에도 민주주의로 다다를 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언제나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언제나 틀에 박힌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뜻이 단지 ‘데모스의 힘’이라는 점을 볼 때, 민주주의는 거푸집에서 찍혀 나오는 주물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한계를 통해 늘 새로운 형태를 불러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에 대한 고찰은 한국 민주주의의 이념, 제도, 운동을 보다 풍요롭게 사유하고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밑바탕이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 했던, 전혀 새로운 얼굴의 ‘민주주의’와의 만남을 앞당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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