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어서면 발걸음이 자주 멈춘다. 작품을 보고 지나쳤다가 제목을 다시 읽고, 설명을 읽은 뒤 다시 작품 앞으로 돌아간다.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림보다 더 많은 생각을 부르고, 사물처럼 놓인 것들이 사물 이상의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는 그런 전시다. 눈을 사로잡는 것보단 보는 법을 조금씩 바꾸는 전시다. 작품 앞에서 먼저 떠오르는 말은 “아름답다”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왜 이것이 작품인가”라는 질문이다.
개념미술은 눈앞에 보이는 결과보다 그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 더 무게를 둔다. 네덜란드 작가 ‘스탠리 브라운’은 걷기와 거리를 작품으로 삼았고, 독일 작가 ‘한네 다보벤’은 숫자와 날짜를 반복해 시간을 기록의 구조로 바꾸었다. 브라질 작가 ‘실도 메이렐레스’는 코카콜라 병과 지폐처럼 사회 안에서 순환하는 물건에 문장을 새겨 넣었다. 이들에게 작품은 아름다운 형상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기준을 다시 보게 하는 장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념미술은 하나의 중심에서만 생긴 게 아니다. 1999년 뉴욕 퀸즈미술관에서 열린 ‘Global Conceptualism: Points of Origin, 1950s–1980s’는 그 인식을 바꾼 전시였다. 그때까지 개념미술은 뉴욕과 서유럽에서 시작해 국제적으로 퍼져나간 하나의 운동처럼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전시는 다르게 보았다. 각 지역의 작가들이 자기 사회의 문제 속에서, 비슷한 시기에, 서로 다른 이유로 개념적 미술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아시아의 개념미술은 단순한 수용이나 모방이 아니라, 각 지역의 정치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생겨난 독자적인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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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능경, 1974,오브제, 세계전도 166.5x212cm, 136x 196.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jpg |
한국 개념미술도 이 흐름 속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서구 개념미술의 뒤늦은 반응으로만 볼 수 없다는 뜻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작가들은 자신들이 놓인 현실 속에서 다른 질문을 만들었다. 지도, 언어, 몸, 숫자, 이름, 기록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었다. 세계를 어떤 기준으로 보고 나누는지 되묻는 방식이었다.
성능경의 ‘세계전도’ 앞에서는 지도가 더는 세계의 지리를 설명하는 도구로만 보이지 않는다. 잘려나가고 다시 배열된 지도는 위와 아래, 중심과 주변, 국가와 국경이 얼마나 불안정한 기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계는 그대로인데, 지도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관람자의 질서도 함께 흔들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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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범 지렁이 공포 게임 1994. 종이에 연필과 성냥개비 18.5X 26.5 cm. 작가 소장. 작가 제공 |
김범의 ‘풍경 #1’은 풍경을 그리지 않았지만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화면에는 하늘도, 나무도, 길도 없다. 대신 캔버스 화면에 문장이 등장한다. 관객은 그 문장을 읽으며 자신이 본 풍경을 기억하고, 보지 못한 풍경을 상상한다. 작가는 그림 대신 글을, 관람객은 보는 대신 머릿속 그림을 불러내는 식이다. 이 작품 앞에서 풍경은 화면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그리는 대로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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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규철 무명 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 1991, 나무, 철, 화분, 문, 가변크기. 작가 소장, 작가제공. |
안규철의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은 예술가라는 이름의 무게를 묻는다. ‘예술’을 뜻하는 독일어 ‘Kuns’t가 적힌 문에는 여러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삶’을 뜻하는 ‘Leben’이 적힌 문은 쉽게 열릴 것 같지 않다. 화분에서는 의자의 다리가 식물처럼 자라 있다. 문과 손잡이, 화분과 의자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예술과 삶 사이에서 길을 잃은 작가의 상태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이건용의 ‘장소의 논리’는 몸과 공간의 관계를 다시 보게 한다. 장소는 배경이 아니다. 사람이 선을 긋고, 안과 밖을 오가며, ‘여기와 저기’를 구분하는 순간 장소는 하나의 질서로 수렴한다. 이 작품에서 몸은 표현의 도구라기보다 생각이 움직이는 과정을 드러낸다.
김홍석의 영상 작업은 익숙한 형식이 얼마나 쉽게 진실처럼 보이는지를 건드린다. 인터뷰, 통역, 자막, 방송 화면은 사실을 전달하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형식이 진실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관객은 어느 순간 자신이 내용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진실처럼 보이는 형식을 믿은 것인지 되묻게 된다.
이 전시에 등장하는 대다수 작가는 대중적으로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 개념미술의 한 흐름은 바로 이 질문들에서 출발했다. 누군가는 지도를 뒤집었고, 누군가는 사고의 과정을 몸의 움직임으로 드러냈고, 누군가는 이름과 언어의 권위를 흔들었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전시장을 나설 때 남는 것은 한 점의 선명한 이미지가 아닐 수 있다. 대신 몇 개의 질문이 따라온다. 지도는 누구의 세계를 보여주는가. 이름은 누구를 기억하게 하는가. 말은 현실을 설명하는가, 아니면 현실처럼 보이는 또 다른 질서를 만드는가. 그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움직인다면, 이 전시의 목적은 이미 충분히 작동한 셈이다.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난달 19일시작해 오는 10월 11일까지 이어진다. 장소는 서울관 지하 1층 6·7전시실과 1층 미술관마당이다. 공성훈, 곽덕준, 김구림, 김범, 김소라, 김순기, 김용민, 김용익, 김용철, 김차섭, 김홍석, 박이소, 박현기, 성능경, 안규철, 오인환, 우순옥, 윤동천, 윤진섭, 이건용, 이교준, 이승택, 정서영, 조경숙, 주재환, 최병소, 코디최, 홍명섭 등 28명의 작가가 던지는 화두를 만날 수 있다. 전시 구성은 회화, 사진, 영상, 오브제, 퍼포먼스 기록과 아카이브 등 140여 점이다.
토요경제 / 마리아김 문화전문기자 kimjjyy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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