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논의 公論을 시작해야

[상임논설위원]정해용 / 기사승인 : 2010-03-04 12: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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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의 역사는 남루하면서도 오뚝하다. 독재자들에 의해 뜯기고 맞춰진 오욕의 과거와, 이를 피를 흘리면서 지켜낸 민주시민들의 값진 희생으로 이루어진 헌법이기 때문이다. 1988년 2월 개정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헌법은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대체적으로 공감하여 공표된 헌법이다.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다는 ‘직선제’를 보장한 이 헌법은 당시로서는 민주적인 대통령 선출권을 국민에게 되돌려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로부터 24년이 흘렀다. 세태가 빠르게 흘러가는 21세기 초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헌법 아래서 지내온 시간은 결코 짧지가 않다. 그 사이에 이 헌법이 지닌 한계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우선 대통령 한 사람의 권한이 ‘제왕적’이라 불릴 만큼 과도하게 편중된 권력 구조의 설정도 그렇고, 5년 단임제라는 경직된 선거제도도 그렇다. 물론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치권의 다수는, 그리고 선거권을 가진 국민의 다수는 지금보다 더 합리적이고 유연한 새 헌법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기한 유력자들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2007년 임기 말이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논의 제안이었다. 취임 초부터 ‘동네북’이던 노 대통령의 제안은 언론에 공표되자마자 사정없이 얻어맞아 겉으로는 마치 ‘부적절한 제안’이었던 것처럼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정치권은 묘하게 그 제안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 차기 대통령의 재임 중에 개헌을 논의하겠다는 타협안에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동의했던 것이다. 대통령도 물러섰다. 결국 겉으로는 개헌 논의 필요성을 부정했지만 내심은 그것이 필요하다는 데 범정치권이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차기, 즉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 지 이제 2년이 넘었다. 그동안 정치권이 개헌 논의에 대해 아무런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정치권은 3년 전 스스로 한 약속을 이행하려는 성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에 이 대통령 스스로가 ‘제한적인’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여권에서는 이미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나 이재오씨 등 실세들이 연내 개헌 필요성을 공공연히 언급한 뒤다. 이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에서는 이제 개헌에 구체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모양이다.
내용이 어떻든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나쁘지 않다. 정치권이 마땅히 논의해야 할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므로 타당하고, 지난 정권 말기에 여야가 함께 타협한 약속을 이제라도 이행하는 계기가 되리라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
다만 여권이 제기하는 개헌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또 어떤 내용에 초점이 맞춰지는가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독수리눈을 바로 뜨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첫째로, 연내 개헌이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반드시 타당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 때 정치권이 반발한 가장 큰 명분은 갑작스럽고 느닷없다는 점이었다. 갑작스럽고 조급하게 되지 않으려면 개헌은 넉넉한 일정을 갖고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현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도 ‘3년이 까맣게’ 남아있다. 만일 개헌을 올해 안에 반드시 해치우겠다고 덤벼든다면 3년 전 노무현의 제안을 거절했던 명분이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의 허울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 개헌 논의는 정당 정파의 이익에 따라 협소한 시각에서 다뤄질 게 아니라 학계와 시민 등 각계의 여론이 폭넓게 반영될 수 있어야 하고, 합리적 결론에 이르기 위한 논의가 공개적이고도 여유 있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연내 개헌’이라고 시기를 조급히 못 박지 말아야 할 중대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파벌의 이익을 우선하려는 정당 정파의 입장과 이를 견제하거나 중재할 수 있는 학자, 시민단체 등의 의견이 광범하게 반영되어 그야말로 ‘公論’이 이루어질 수 있는 넉넉한 시간과 합리적 수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정치권이나 뜻있는 시민들이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파 이익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대통령 한 사람에게 편중되어 있는 과도한 권력집중의 문제다. 지금 대통령의 권력은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근간인 삼권분립의 건재를 위협할 정도로 과도하다. 심지어 자신이 속한 여당 세력의 다수가 반대하는 일조차 대통령은 개인의 권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내용의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전임 노무현 대통령의 수도 이전이나 부동산 세제개편 등이 그랬고, 지금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개발사업이 그렇다. 정당정치의 이상은 개인의 뜻이 아니라 그를 있게 한 정치세력의 衆智를 반영하는 대리인으로서의 대통령에 있는 게 아닐까.
개헌 논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쪽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이나,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사심을 버리고 진정 필요한 내용을 고민해야 한다. 그 논의의 시작은 당장이라도 이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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