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공룡? 춤추는 코끼리?

정해용 상임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11-06-27 11: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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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100세를 넘기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기업이 100년을 넘기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대대손손 가업을 잇는 일은 적지 않으나 조직으로서의 기업이 100년 넘게, 그것도 건전하게 존속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거기 몸담았던 사람의 수가 몇 명일 것이며, 그 기업이 만든 제품이나 발명이 얼마일 것이며, 그 안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영욕의 사건들이 얼마일 것인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던 1993년 벽두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그룹 내 전 임직원에게 개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면서 남긴 말이 유명하다. ‘정치권력은 길어도 10년이지만 기업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길다.’ 이후 삼성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이 회장의 지침을 중심으로 세계 일류를 향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과연 정치권력은 지형이 바뀌고 경제정책을 좌우하는 정관계의 책임자들이 또한 바뀌었으나 삼성은 건재했다.

때마침 성사된 서울 월드컵 축구로 대한민국의 위상은 국제무대에서 크게 등급이 높아졌다. 그런데 세계인들은 2002 월드컵을 개최하고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한 나라가 바로 ‘삼성과 현대, LG의 나라 대한민국’이라고 기억했다. 만일 이건희 회장이 ‘세계 일류기업’이란 목표를 제시하며 경영 혁신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21세기에 삼성이 이처럼 성공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 당시에도 이미 국내 최대 재벌이라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 자족하고 안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오늘 같은 글로벌 다국적 기업으로서의 성취는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올 6월로 창업 100년을 넘긴 미국계 글로벌 기업 IBM의 경우가 삼성에게는 타산지석일 수 있다. IBM이 지나온 100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인류의 삶이 변화한 20세기를 관통하고 있다. 그 변화를 앞에서 이끌어온 것이 바로 IBM이었다. OCR로 불리는 컴퓨터용 천공카드를 개발해 대학예비고사나 선거 개표 같은 대량분석, 대량통계가 가능하게 한 것도 IBM이었고, 컴퓨터가 사람의 언어 알파벳을 알아듣게 하는 프로그래밍 언어 포트란을 개발한 것도 IBM이었다. IBM의 슈퍼컴퓨터는 인간의 달 착륙을 위한 아폴로 프로젝트를 도왔다. 지금은 작은 가게나 식당에서도 사용하는 카운터 집계관리 프로그램과 모든 유통 상품에 사용되는 바코드를 개발한 것도 IBM이다. 은행의 본지점간 온라인망 구축이나 마그네틱선이 부착된 신용카드나 전철표 등 전자카드도 이 회사에 의해 처음 상품화되었다. 무엇보다 중대한 업적은 80년대 후반, 최초로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간편한 개인용 컴퓨터(PC)를 내놓은 것이다. 이 컴퓨터를 돌리기 위해 OS도 개발했는데, 그것을 담당했던 마이크로 소프트는 수년 내 IBM을 능가하는 회사가 됐다. 사실 이것이 위기의 발단이었다. MS 뿐 아니라 HP, 로터스, 인텔 등등의 회사가 IBM과 완벽히 호환되는 PC를 내놓거나 운영체계 마이크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등을 개발하고 나섬으로써 IBM은 독점적인 지위를 빠르게 잃어갔다.

83년부터 3년 동안 미국 경제잡지 ‘포츈’ 선정 세계 우량기업 순위에서 1위를 달리다가 89년에는 무려 45위로 내려앉는 수모를 당했다. 93년 1월에는 175 달러씩 하던 주가가 하루아침에 42달러, 무려 1/4 가격으로 폭락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월가에서는 IBM이 회생하지 못할 거라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했다. 문제는 성공이 오래된 조직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엘리트주의와 관료화에 있었다. 얼마나 경직된 형식과 타성에 얼마나 젖었던지 어떤 일을 위해서는 실무자부터 CEO까지 거쳐야 할 직급 체계가 11단계나 됐다. 자신들이 만든 컴퓨터를 돌리기 위한 운영체계(Dos)를 MS에게 맡겨 남 좋은 일을 한 것도 이런 게으름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공룡화한 조직은 계속되는 시장의 변화에 따라가기가 어렵다.

바로 그 시점에서 IBM이라는 공룡기업을 해체 정리하기 위해 고용된 최초의 외부영입 CEO 루이스 거스너 회장이 IBM 살려냈다. 그는 곧 IBM이라는 조직의 상위 100명 중 절반을 교체하고 인재관리에 많은 시간을 투여했다. 고객서비스를 강화하고 소프트웨어와 네트워크 사업에도 눈을 돌렸다. IBM은 살아났다. 거스너 회장이 주력한 것은 ‘기업문화’였다. “10년 가까이 IBM에 있으면서 나는 문화가 승부를 결정짓는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승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 이건희 삼성 회장이 계열사에서 발견된 부적절한 행위를 징계하는 것을 계기로 또 한 번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타성에 젖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원들이 부정부패하면 기업은 위기를 맞게 된다고 질타했다. 감사기능의 부활을 시작으로 강도 높은 개혁이 시작됐다.

IBM이 80년대 중반 절정기에서부터 방만해져 위기를 겪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당시 IBM의 임직원 수는 132개국 40만 명, 시장점유율은 90퍼센트를 넘었고 연간 투자비용은 한 국가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지금 삼성그룹은 78개국에 임직원 31만을 헤아린다. 지난해 연매출은 254조원, 우리나라 1년 예산은 293조 정도였다. 국내 총생산(GDP)의 20% 가량을 차지하는 삼성의 개혁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하다. 크기는 공룡 같더라도 결코 게으름과 타성에 빠지지 않고 발전을 지속할 수 있는 체질. 삼성의 개혁이 지향할 바는 바로 여기에 있을 터다. 이런 체질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바로 기업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정상의 충족감에 빠진 그룹 전체를 일깨워 ‘춤추는 코끼리’가 되게 할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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