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자기 이름으로 살기

정해용 / 기사승인 : 2009-11-09 1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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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K여사가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 돈을 빌려주었는데 갚질 않아요. 오늘은 남편을 만나서 따지기로 했답니다.
잠시 후 남편이란 사람이 나타났다. 가끔 TV에서도 볼 수 있는, 나름 명예가 있는 공직자다.
- 언제까지 갚겠다는 확실한 약속이 없이는 가만있지 않겠어요.
- 언제 빌려줄 때는 저한테 허락이라도 받고 하셨습니까? 그런 걸 꼭 남 망신까지 시켜가며 받아야겠어요?
- 그럼 어떡합니까. 누구 와이프다 하는 거 믿고 빌려준 건데, 지금까지 기한을 몇 번 넘기도록 모른 척하면 내가 무슨 수가 있어요.
큰 소리로 떠드는 통에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릴 수밖에 없다. 듣자니 두 사람 다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남편의 책임을 따지자면 우선 돈 빌린 사람이 남편 알게 빌렸느냐 남편도 모르게 빌렸느냐, 부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했느냐 그렇지 않으냐 등등의 여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책임 여부 이전에 자신의 명예가 먼저 걸려있다. 채권자는 먼저 당신의 직장에 알리고 그래도 안 되면 소송을 걸겠다고 으름장이다. 같이 썼는지 아내 혼자 썼는지는 모르지만, 남자가 난감한 입장에 처한 건 사실이다.
살다보면 남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을 꽤 많이 볼수 있다.



아무개의 아내, 아무개의 남편, 아무개의 자식, 아무개의 부모, 아무개의 친인척, 아무개의 동창생, 아무개의 이웃 등등.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인연이라고 하는데, 그 관계는 계약이나 약속 같은 것과 무관하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따라다닌다. 한번 맺은 관계가 거의 영구적으로 끊어지지 않는 끈끈한 것일 때는 인연이라는 말도 모자라 ‘연줄’이라 부른다. 부부관계 같은 것은 두 사람 사이의 합의에 의해 간단히 끊어지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 남편, 전 부인 같은 ‘관계명사’를 완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다.



주변에 보면 의외로 자기 이름보다는 ‘누구의 무엇’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자식의 학교에 학부형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에야 ‘아무개 엄마’ ‘아무개 아빠’라 불리는 게 편리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일상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에도 스스로를 ‘누구 엄마라 불러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하기 보다 ‘누구의 무엇’으로 불리기를 선호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단순한 습관이 그리 된 경우도 많다. 역시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할 때 더욱 안도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닐까.



습관이야 그렇다 쳐도, 어떤 이익과 관련된 일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행세하는 경우는 좀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도 모르게 ‘누구의 가족’ ‘누구의 친구’라는 자격으로 외상을 긋고 돈을 빌렸을 경우, 여차하면 그 ‘누구’의 이름을 도용하여 피해를 끼치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혹은 ‘누구의 무엇’임을 내세워 마치 자신이 그 ‘누구’인 것처럼 행세하는 꼴불견도 있다. 공직자의 친인척 비리라는 것은 대개 이런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그런가하면 가만히 있는 ‘누구의 무엇’인 사람을 꼬드겨 그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하도록 부추기는 사람도 있다. 특히나 그 ‘누구’가 위세가 강한 사람일수록 그 ‘누구의 무엇’인 인연들을 찾아다니는 브로커도 들끓게 마련이다. 물론 그 ‘누구’라는 당사자도 아닌데 ‘누구의 무엇’이란 이름만 듣고 그 사람을 ‘누구’ 대하듯 이익을 제공했다가 피해를 입는 사람도 남 탓만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일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다 같이 억울하달 수 밖에.



자고로 명예나 힘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의 주변에서 그와 어떤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그 당사자의 명예를 함부로 도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자면 사람들이 ‘누구의 무엇’으로 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기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의미다. 사람마다 자기 이름에 대한 책임과 명예를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이른 아침부터 언성 높여 다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웃는 낯으로 조용조용 말해도 매사 순조로운 세상. 가끔이야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쳐도, 일상은 그러해야 살맛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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