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 시골 부모님이 찾아오시는 걸 꺼리는 풍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래도 시골 부모님이 찾아오시면 맞아들이고 재워드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데, 요즘은 요행히(?) 그런 일도 면할 수 있게 되었단다. 왜? 부모님이 자식들의 집을 찾아오는 일 자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건 또 왜? 아파트 이름이 하도 어려워 이름을 외울 수 없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있는 사람일수록 외국어 이름, 그것도 여러 단어가 합성되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생소한 단어의 이름을 가진 아파트를 선호한단다. 시어머니가 택시를 타고 가고 싶어도 아파트 이름을 말하기가 어려우니 어지간하면 방문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아파트 명칭을 두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농담이다(어쩌면 진담일 지도 모르겠다).
어지간한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조차, 일상에서 영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닌 한 그 뜻을 선뜻 알기 어려운 이름이 흔해빠졌다. 10여 년 전부터 초호화 주상복합 건물에 외국어 이름이 붙는가 싶더니 이제는 열 평, 스무 평짜리 동네 연립주택까지도 국적을 알기 어려운 외국어 이름을 붙이는 게 관습이다. 한글로 이름을 붙이면 집값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서울에서도 멋쟁이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거리의 간판을 들여다볼까. 플레이트, 비샵, 아트르, 플레이스, 티홀릭, 페라, 머랭, 수플레, 랩, 테라스, 디아, 가또…. 여기에 한글로 옮겨 적어서 망정이지 아마 온통 꼬부랑글씨 투성이인 이 거리에 서면 아예 읽기조차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조금 더 고급스럽다는 거리로 가면 영어 정도는 우습다. 영어 명칭이 하도 흔하다 보니 요즘은 유럽어권 언어를 사용하는 게 새로운 추세라던가. 이태리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간판이 대세를 이룬다.
사실 외국어로 멋을 부렸다는 건, 인간 심리의 이치로 볼 때 전혀 미친 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멋 부리기나 꿈꾸기(환상)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 멋 부리기나 환상에는 ‘생소함’이 유력한 수단 중 하나다. 생소한 것은 일단 신선한 느낌이 있어 남의 눈을 끌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외국어란 생소함을 동경하는 본능에 부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다만 외국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商魂과 맞물려 도를 넘어 남발되는 나머지, 정작 바르고 고운 우리말 간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 볼썽사나운 현상이 되었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있다. 고객의 기호에 영합하여 수익을 올려야 하는 대기업이나 개인사업자들은 그렇다 치고 어째서 정부기관이나 공기업들까지 모두 한글을 포기하고 영어 알파벳으로 이름을 지어야 하는 걸까. SH, NH, LH, 케이 워터, 코레일, 서울메트로…. 정부 산하기관들 가운데 상징마크에 영어 알파벳을 사용한 곳은 많아도 한글을 사용한 곳은 더욱 드물다. 국감자료에 따르면 216개 기관 가운데 겨우 세 곳이 한글을 사용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찾아오기 어려운 이름의 아파트를 선호하는 며느리들처럼 정부의 공기업들도 소비자들이 불편이 있어도 이름을 몰라서 민원 제기를 망설이도록 만들려는 의도는 아닌가 하는 우스운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외국어 간판은, 외국어가 익숙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불편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외국어가 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불편하다. 외국에 가서 살아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편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그 생소함의 불편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풍조는 외국어가 익숙하고 외국에 가봤거나 살아본 사람들에게 편리한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많이 배우고 많이 돌아다녀본 사람들에게 편리한 사회가 되는 대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세상이 되어간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돈이 있는 계층과 없는 계층 사이에 간극을 넓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외국어가 불편한 사람들은 둘 중 하나의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외국어가 넘쳐나는 사회로부터 소외되며 자기 열등감과 자기비하로 이 속에서 익숙하게 살아가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뜻도 잘 모르면서 같이 아는 척 어설픈 위선의 태도로 적응하게 되거나.
한글날을 지나면서 문화관광부가 한글날을 국경일로 재지정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이다. 다만 이 부처가 그동안 한글 홍보에 관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지적에 이르면, 국경일 지정 운운도 막상 닥쳐서야 한마디 내뱉는 의례적 언사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한글. 정부기관들부터 그 소중함을 진정성으로 대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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