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에 카샤파라는 부처님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부잣집 부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부처님이 제자 비구들과 함께 부잣집에 가려는데 어떤 여자가 찾아왔다. 옷차림은 남루하였고 손에 받쳐 들고 온 작은 접시에 든 음식은 거칠었다.
"이제 곧 부잣집에 가서 진수성찬을 마음껏 먹게 될 터에 이런 악식이라니." 여자의 공양이 반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스님들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부처님은 여인의 공양을 즐거이 받으셨다.
부잣집에 도착한 것은 그만큼 늦어졌다. 부인은 부처님 일생이 지체된 사유를 듣고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먼저 초청을 해서 시간이 정해져 있고, 이렇게 공들여 온갖 음식을 준비해두었건만 저런 여자의 악식을 드시느라고 이리 늦게 오시다니. 게다가 악식으로 먼저 배를 채워 내 잔치 음식은 잘 드시지도 못하네. 그 가난뱅이 여자는 하필 이럴 때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을 들고 와 부처님의 길을 가로막을게 뭐람."
스님들이 한번 골난 부인의 마음을 무슨 말로 풀어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부인은 죽어 가난한 여자로 태어났다. 오백 번쯤 더 가난뱅이로 태어나 죽을 고생을 다하면서 여자는 점차 자신의 교만을 후회했고, 반성했으며, 마침내 경건하게 되어 스님과 부처님을 잘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오백 번째 생에서 그녀의 이름은 난타였다. 그녀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곤 했다. 그 날도 온종일 돌아다녀서 얻은 한 푼의 돈으로 기름을 사서 서원에 불을 밝혔는데, 밤이 되고 다시 낮이 되어도 꺼질 줄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바친 등불은 모두 꺼진지 오래지만 여인의 등불은 오히려 더 밝아졌으며 이튿날 아침까지도 꺼지지 않고 있었다. 절의 승려 마우드갈야야나가 이제 낮이 되었으므로 등불은 없어도 되겠다며 불을 끄려했으나 아무리 입으로 불고 손으로 덮어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것을 본 부처님이 말했다. “그만 두어라. 그 등불은 한 가난한 여인이 일체중생을 건지려고 간절한 정성으로 켠 것이니 너희들 힘으로는 끌 수가 없다.” 그리고는 엎드려 절하는 난타에게 말하기를 “너는 이제 부처가 되어 이름을 등광이라 할 것이다.” 하였다.
한국은 종교가 차고 넘치는 나라라고들 한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기타 종교 등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이 좁은 땅 안에 공존한다. 각 종파가 주장하는 신도의 숫자를 다 합하면 전국 인구보다 숫자가 많다고도 한다. 각 종교가 열정이 희박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불교도 기독교도 그 어떤 나라보다 열정적으로 부흥하고 있고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 발달돼 있다. 종교와 철학의 경계에 있는 유교를 종교로 삼는 인구도 그에 못지않다.
이처럼 다양하고도 열정적인 종교가 좁은 땅 안에 공존하면서도 종교간 마찰과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드물다. 이것도 세계적 모범사례라고 한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종교가 보여주는 저력이자 하나의 아이러니다(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 일부 종파에 의한 타종교 배척 현상이 새로운 우려가 되고 있기는 하다).
한국사회에서 종교의 아이러니는 또 있다. 세계가 인정하는 고등종교가 이처럼 발달된 나라인데도 인의와 자비의 정신은 늘상 시험대 위에 있다는 점이다. 입으로는 부처님의 자비나 예수의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으면서도, 정작 이 사회는 자비와 사랑이 넘치기는커녕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서로를 밟아 넘어뜨리는 살벌한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다.
종교가 발달한 많은 나라에서 대다수 지도층과 지식인들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의 정신을 정책에 반영하려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인품이나 정신세계가 지도자를 뽑는 덕목으로 중시되지 않는다. 외형적으로는 대다수 국민들이 우수한 종교적 가르침에 열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지도자를 뽑는 선거에서 국민들 대다수는 후보자의 정신세계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누가 더 잘살게 해줄 것인가, 나라나 고장을 누가 더 부유하게 이끌어줄 사람인가. 겉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는 고등종교가 민심을 이끌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민심을 지배하는 것은 돈, 물신주의다.
사람들은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면서 어떤 마음을 가질까.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헌금을 바칠 때 어떤 마음을 가질까.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자신이 드리는 만큼에 상응하는 만족감을 느껴줄 것을 기대하지는 않을까. 그러므로 가난한 여인이 겨우 한두 푼의 돈으로 켜서 바치는 촛불 하나보다는 자신의 많은 재물위에 더 큰 기쁨을 느끼고 더 큰 축복을 내려주어야 당연하다는 속셈을 갖지는 않을까. 부자로서 카샤파 부처님을 공양하려다 이후 오백 번이나 가난뱅이로 태어나는 벌을 받았던 여인 난타의 이야기는 부처를 섬기는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비슷한 이야기는 기독교 성서에도 나온다. 예수는 가난한 과부 여인이 바친 전 재산 은돈 한 푼이 부자가 바친 열량의 금돈보다 값지다는 비유를 말씀한 적이 있다.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께 공양할 때 그것이 자신의 알량한 부와 성공을 과시하려는 위선이 아니라 진정 가난한 진심을 온전히 다하여 바치는 것인지를 자문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모든 종교인들이 과연 나는 ‘신앙인으로 위장한 물신주의자’가 아닌지,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기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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