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도시국가 아테네는 오늘날까지도 인류가 꽃피운 문민 민주주의의 상징모델로 거론된다. 주먹보다는 말이, 특권보다는 논리가 우선했던 그 시대에는 각종 이론으로 무장한 논변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시대다.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의 시조가 바로 그 사회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있다 해서 그 사회가 반드시 현능했던 것만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있는가 하면, 그의 진리와 진실에 대한 열정을 견제하고 억압하고 부정하려는 궤변가들도 무수했다. 대표적으로 소크라테스를 향해 ‘신을 부정하고 청년들을 선동해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라는 공격이 쏟아졌는데,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란 판결이 내려진 것도 바로 그러한 모함 덕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는 그 순간 그 시대의 사람들도 그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동등하게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법정을 열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시민법정은 모함과 거짓 궤변으로 꾸며진 궤변가들의 논고를 받아들여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愚衆政治’의 전형이었다.
오죽하면 소크라테스의 첫 제자로 일컬어지는 플라톤은 이후 ‘우매한 사람들까지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 민주주의에 대해 혐오의 감정을 가졌다. 플라톤의 대표저작인 <국가론>이 만인평등의 민주주의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태어난 아이들을 대등한 조건에서 공동 양육하되 타고난 자질에 따라 교육의 단계를 차등하여 생산계급과 중간계급, 그리고 영재들로 구성된 엘리트 계층을 단계적으로 구별하는 교육방법론을 역설했다. 그러한 교육 차별은 계급차별로 이어지고, 나아가 양육된 구성원들의 역할도 달라지도록 설계했다. 다수의 생산 계급 위에 사회를 보호하고 관리해나갈 공무원과 기사계급을 두고 정치는 가장 우수한 소수에게 맡기자는 구상이다.
개나 소나 권리를 주장하는 대중민주주의에는 분명 함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똑똑한 몇몇이 거짓으로 선동하면, 상식도 모자란 군중들이 그 거짓에 선동되어 선량하거나 정말 사회에 필요한 인재에게 몰매를 가하는(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아테네 시민법정처럼) 바보같은 짓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안으로 제시된 플라톤의 이상주의 국가론도 반드시 현실적인 아이디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몇몇 전제국가들이 플라톤의 理想國家를 표방한 적은 있지만, 이를테면 히틀러의 나치즘 정부도, 그것이 결코 현실적인 아이디어가 될 수 없음을 증명했을 뿐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사회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가는 정치는 상당히 효율적인 사회구조를 가져올 것 같이 들린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러한 이상주의 국가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리더들이 상당히 도덕적인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간과했다. 사회를 소수의 영재 엘리트들에게 맡기고 그 외 다수의 구성원들이 아무런 이의 없이 엘리트들의 리드에 따라갈 수 있으려면, 엘리트들은 개인의 사리사욕에 빠지지 않고 철저히 사회 공공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집행하는 ‘도덕의 化身’쯤 되어야만 할 것이다.
만인평등 이념에 따라 대중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현대의 시민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대개 전 국민 투표에 의한 선거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이 제도는 사회를 효율적이고 현명하게 이끌어갈 ‘엘리트 정치’의 장점을 취하기 위한 장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우리 중에서 누가 가장 현명한가, 누가 사회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으며, 누가 우리 사회를 안전하게 지켜줄 능력이 있는가. 이러한 기준으로 최고의 엘리트를 뽑아 국회의원이며 대통령 자리에 앉히고 그들에게 사회를 이끌어갈 권리와 의무를 맡긴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시험을 거쳐 관리들을 선발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찰권을 맡기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정관리의 의무를 맡긴다. 그만한 권리도 넘겨준다.
그러나 이렇게 선발된 엘리트들이 만일 다수 시민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잊고 주어진 권리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 엘리트의 일탈이 용인되는 사회와 나라는 반드시 부패하고, 안전할 수도 없다. 나아가 시민 민주주의는 뿌리부터 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 국가사회의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향하게 될 것이다.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검찰조직에서 민간 브로커들로부터 향응 접대가 폭넓게 이루어졌다는 정황이 드러나 사회가 시끄럽다. 사실이라면 국가의 미래 운명이 흔들릴 중대한 사건이다. 검찰은 즉시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검찰이 긴장하여 움직이는 배경은 궁금하다. ‘비리가 없었는데 있는 것처럼 폭로되어 분노’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비리가 있었다는 폭로만으로도 부끄럽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분노와 수치심, 검찰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검찰뿐 아니라 오늘의 정치가, 관료들이 두루 해당할 금언이 있다. 羞惡之心義之端也, 잘못된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義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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