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대학과 일반대학에 동시 합격한 아이가 있어 그 선택을 두고 온 가족이 고민을 했다. 아이는 자기 적성에 맞는 일반대학 공부를 원했지만, 아이가 장차 순탄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부모들은 쉽게 교대를 포기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장단점을 놓고 갑론을박을 하던 차에 마침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척이 연결이 되어 그의 의견을 듣게 되었다. 서울에서 교대를 나오고 교직에 종사한지 20년을 훌쩍 넘었으니 교직의 빛과 그림자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사람일 것이었다. 그런데 친척 선생님은 얘기를 듣자마자 “교직이 옛날처럼 쉽지 않다”고 입을 열었다.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해서 무조건 존경하거나 따르지도 않으며, 제멋 대로인 데다 폭력적인 아이들도 많아서 교사로서의 사명감이나 대단한 인내심이라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생활을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육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평생 직업보장과 안정된 연금제도의 유혹을 뿌리치고 중도 사퇴까지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 학교생활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현장의 교사들에게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보도를 통해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학교폭력의 심각성은 얼마든지 알 수 있다. 때리거나 돈과 물품을 빼앗는 것으로도 모자라 상급생에 의한 집단 성추행사건까지 드러나고 있다. 개인 대 개인 사이의 왕따나 폭행은 오히려 소박하다. 폭력이 조직화되어 선후배 사이에 대물림이 되고 학교 사이에 연대가 되어 수십 개 학교 학생들이 엮인 피라미드식 먹이사슬까지 등장했다. 이건 아예 조폭이나 다름없다. 졸업이나 중퇴 후 학교 주변을 맴돌며 후배들을 뜯어먹는 ‘직업폭력’도 있는 모양인데, 대다수 학교가 이들로부터 학생을 제대로 보호하기는커녕 피해 상황을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부가 경찰의 힘을 빌어 강력한 법적 처벌로 대처하려는 모양이다. 사실 이것은 임시방편을 넘을 수 없다. 처벌을 강화한다는 것이 경고적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교육적 측면에서는 하책 중에 하책(下策)일 뿐이다. 당근과 채찍을 위주로 기른다는 것은 동물 사육에서나 통할 말이지, 인격체를 길러내는 학교 교육에서의 원칙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기성세대가 아이들을 제대로 인격체로 길러내지 못한 책임을 아이들에게 떠미는 격이다.
자고로 좋은 의사는 병의 증상을 다스릴 뿐 아니라 나아가 근원을 고친다 했다. 아이들의 무절제함과 폭력성, 심지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치판단조차 못하는 무지를 하나의 병세라고 비유하자면, 그 치료는 아이들에게 절제를 가르치고 폭력의 위험성과 모순성을 가르치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길러주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다. 당장 ‘발작’하는 아이들에게 가하는 처벌은 응급조치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것을 ‘대책’이라 불러선 안 될 것이다.
많은 교육이론에 의하면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한 사람의 성인이 되기까지 육체적 정신적 분화와 발달과정이 나이에 따라 전개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시기가 바로 유아기로부터 소년기를 지나며 성격과 인품을 갖춰가는 시기다. 좀 더 자세히 연령별 발달과정을 나눠보면 자제력이나 인내심, 평화적 품성 등은 학령기 이전 부모와 가정환경 속에서 길러지고, 감정의 조절능력이나 이성적 판단 능력은 7세에서 14세(사춘기)까지의 시기에 길러진다. 마침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특히 권위 있는 발도르프 교육 이론에 의하면, 아이들은 영구치가 나기 시작하는 7세 무렵을 전후하여 자신들이 복종해야 할 권위라든가, 앞으로 따라야 할 삶의 모델에 대한 의식이 형성된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자신을 지휘하고 복종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에 의해 머릿속에 권위의 실체가 각인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부모와 교사들이 회초리나 꾸지람이라는 물리적 수단으로 교육한다면 이 시기 아이들은 폭력적 수단을 문제해결의 지름길로 배우게 될 것이다.
어쩌다 아이들의 학교 사회가 야비한 폭력과 거짓이 판치는 동물의 왕국처럼 되어버렸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아이들을 법으로 응징하기 전에, 과연 부모와 학교는 그들에게 어떤 이상을 심어주고 어떤 가치를 가르쳐주었던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자식세대에게 좋은 모본을 보이지 못하고 일찌감치 권위도 잃어버린 모든 부모 세대, 기성세대의 뼈아픈 반성이 학교폭력 근절을 위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대책이 아닐까.
정해용 상임논설위원(peacepress@hanmail.net)
[저작권자ⓒ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