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칼럼]같은 ‘개방’이라는 말, 전혀 다른 길—김대중과 이재명의 간극

이덕형 기자 / 기사승인 : 2025-12-28 09: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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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과정’을 만든 개방과 관계를 ‘관리’하는 개방, 무엇이 다른가
▲이덕형 편집국장
[토요경제 = 이덕형 기자] 김대중 대통령 재임 당시 필자는 YTN에 근무했다. 이른바 ‘햇볕정책’이 추진되던 시기, 북한을 방문해 기획 취재를 진행했고 ‘남북 화해와 협력’을 주제로 한 보도 프로그램을 제작·방송했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지금, 같은 민주당 정부임에도 여당의 대북 정책은 당시와는 확연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정책은 비슷한 단어가 아니라 다른 맥락에서 갈린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모두 ‘개방’이라는 말로 묶는 순간, 본질은 흐려진다. 두 정책은 표면상 닮아 보일 수 있으나, 출발점과 도착지가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가 지금의 논쟁을 가르는 핵심이다.

김대중의 정책은 ‘과정의 정치’였다. 그는 독일 통일에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읽었다. 정보와 방송의 개방은 통일을 촉진한 요소였지만, 그것은 긴장 완화와 신뢰 축적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개방은 출발점이 아니라 도달점이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북한의 선전 채널을 제도적으로 열지 않았다. 대신 교류를 늘리고 적대적 언어를 줄였으며, 경제·인도적 협력을 통해 환경을 바꾸는 데 집중했다. 그의 개방은 “먼저 열어주자”가 아니라 “열릴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자”는 접근이었다.

반면 이재명의 정책은 ‘관리의 정치’에 가깝다. 최근의 논쟁은 북한의 공식 기관지인 노동신문 개방 문제로 응축된다. 이는 정보가 자연스럽게 유입되는 상황이라기보다, 특정 선전 매체를 제도적으로 허용하는 선택에 가깝다. 접근 방식은 빠르고 직접적이다. 관계 복원과 외교적 제스처를 중시하며 표현의 자유와 교류 확대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단계성은 약하고 상호주의는 불분명하다. 남측 언론의 북측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일방적 개방은 구조적 비대칭을 남긴다.

독일의 경험을 떠올리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 방송을 시청한 것은 ‘허용’의 결과가 아니라 ‘차단 불가능성’의 산물이었다. 다원적 언론이 흘러들어가면서 인식이 바뀌었고, 그 변화가 통일의 토양이 됐다. 김대중은 이 점을 읽었다. 그래서 그는 선전 채널을 여는 대신, 선전이 힘을 잃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반면 노동신문 개방은 메시지의 다원화를 확대하기보다 단일한 체제 메시지를 제도적으로 통과시키는 선택이다. 이는 독일 통일의 교훈과 결이 다르다.

문제는 그 위험의 성격이다. 첫째는 정보 비대칭이다. 상호 접근이 보장되지 않는 개방은 비용과 영향이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둘째는 프레이밍 리스크다. 핵·미사일·인권처럼 민감한 사안에서 체제 정당화 프레임이 ‘원문’ 그대로 유통될 경우, 사회적 논쟁과 법적 충돌이 뒤따를 수 있다. 셋째는 선례의 문제다. 한 번 제도화된 개방은 되돌리기 어렵다. 정책은 의도보다 선례로 기억된다.

이 차이를 ‘계승’이라는 말로 덮는 것은 역사에 공정하지 않다. 김대중의 개방은 통일 전략의 일부였고, 이재명의 개방은 관계 관리의 수단이다. 전자는 체제 변화의 가능성을 키우는 우회로였고, 후자는 당장의 접촉면을 넓히는 직선로다. 어느 길이 옳은지는 결과가 말하겠지만, 두 길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치는 선택의 예술이다. 그러나 선택에는 비용과 책임이 따른다. 김대중은 느렸지만 구조를 바꾸려 했고, 이재명은 빠르지만 구조적 리스크를 안는다. 같은 ‘개방’이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다르다. “무엇을 열 것인가”가 아니라 “언제, 어떤 조건에서, 어떤 대가로 열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두 정책의 간극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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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 기자
이덕형 기자 1995년 방송사 기자로 입사한 뒤 사회부,정치부,경제부 등 주요부서를 두루 거쳤습니다. 앵커와 취재기자,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현장을 누볐고,올해로 기자 생활 31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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