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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 이야기] <26> ‘외화내빈’ 워싱턴 특파원
  • 김영인
  • 승인 2018.06.21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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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는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특파원에게 전화를 했었다. 모처럼 미국까지 왔으니 만나보고 돌아가는 게 ‘예의’였다. 게다가 워싱턴 특파원은 기레기에게 가까운 선배 기자이기도 했다.

출국 때 적어간 번호로 전화를 했지만 특파원은 받지 않았다. 받는 대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성 메시지를 남기라는 목소리였다. 기레기는 특파원에게 메시지를 남겨놓은 다음에 ‘외국’ 여성의 희한한 반나체 춤을 구경하러 갔었다.

원래 신문사라는 곳은 선배 기자가 돈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전통이었다. 밥 먹고, 술 먹고, 무슨 엉뚱한 짓을 하더라도 후배 기자가 계산하는 법은 없었다.

후배 기자가 돈을 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예의에 어긋났다. 모처럼 낑이 생겼다고 ‘자진신고’하고 나서 돈을 낼 경우에도 일단은 ‘실례’로 간주되었다. 선배 기자의 자존심을 긁는 ‘무례’였다.

왜냐하면 낑은 후배 기자만 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배 기자는 후배 기자보다 낑을 받아본 경험에서 있어서도 선배다. 기자생활을 해도 훨씬 오래 했다. 그래서 후배 기자가 감히 선배 기자 앞에서 계산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후배 기자는 선배 기자와 함께 술을 마시면 당연히 얻어먹는 게 정상이었다. 계산은 선배 기자의 몫이었다. 항상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었다. ‘불문율’이었다.

그러면 선배 기자만 손해 보는 것 아닌가. 그렇지도 않았다. 후배 기자도 세월이 지나면 선배 기자가 될 것이었다.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얻어먹을 수 없었다. 새로 들어오는 후배 기자에게 술을 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공평한(?) 불문율이었다.

어쨌거나 기레기는 선배 기자인 워싱턴 특파원을 만날 수 있었다. 몇 년 만이었다. 당연히 한 잔이 없을 수 없었다. 바쁘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한 잔 해야 하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기레기는 ‘한미 현안’이 아닌 특파원의 ‘고달픈 생활’을 취재할 수 있었다.

특파원은 고달팠다.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쥐꼬리 체재비로 가족과 함께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 교육비도 지출해야 했다.

가난한 신문사에서 얻어준 집이 넉넉할 수는 없었다. 그 좁은 집에 팩시밀리 한 대를 놓고 사무실이라고 하고 있었다. 변변한 사무실조차 없었다. 신문사 특파원은 이를테면 ‘재택근무’의 원조(?)였다. 그래서 음성 메시지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잡일’이 많았다. 기레기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레기뿐 아니었다. 신문사 기자들은 걸핏하면 해외출장이라며 찾아왔다. 일일이 만나줘야 했다. 기자는 물론, 신문사의 높은 사람, 낮은 사람도 찾아왔다. 동료도 찾아왔다.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가 아는 척하며 찾아올 때도 있었다.

기자는 더군다나 싸돌아다니는 게 직업이다. 직업 덕분에 이래저래 알게 된 사람도 많다. 발이 좀 넓은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도 워싱턴에 들르면 연락을 해올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면 만나줘야 했다. 시간이 없다거나, 핑계를 대면서 피하기라도 하면 뒤통수에 간지러운 소리가 바로 들리는 것이다.

또한 찾아오는 사람 가운데 현지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몇 년째 생활하는 특파원도 잘 모르는데 초행길인 사람이 알 재간은 없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는 ‘관광가이드’까지 해줘야 했다. ‘파트너’를 구해달라고 ‘재롱’을 떠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본연의 ‘업무’인 기사까지 써서 신문사로 보내줘야 했다. 밖에서 보면 그럴 듯한 신문사 특파원이지만 실상은 피곤한 것이다. ‘선망의 대상’인 신문사 미국 특파원의 생활은 이랬다. 좀 유식한 표현으로 ‘외화내빈’이었다.

특파원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신문사 굴러가는 얘기였다. 요즘 편집국장이 어떻고, 어느 부서의 부장이 어떻다는 등이었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는 길어지고 있었다.

기레기는 특파원의 양해를 얻어 ‘불문율’을 깼다. 술값을 계산한 것이다. 한 잔 더 마시자며 택시를 불러 달려간 곳은 특파원의 집 겸 사무실이었다. 아이들에게 줄 선물까지 들고 갔지만 특파원의 아내는 도끼눈이 되고 있었다. 특파원은 '‘손님’ 만나는 일을 집으로 연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이 글은 도서출판 지식공방에서 펴낸 저서 ‘촌지’를 약간 수정, 보완해서 재록하는 것입니다>

 

김영인  belly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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