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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 이야기] <16> 홍콩의 밤 '예·라이·썅'
  • 김영인
  • 승인 2018.05.15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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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해외출장을 가면, 필요한 경비를 출입처에서 모두 댄다고 했다. 비싼 비행기표값은 물론이고, 호텔 숙박비, 밥값, 술값을 모두 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재미가 없다. 기자들이 그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낑'이 없는 출장은 출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그랬다.

해외출장의 경우도 국내 지방출장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기레기 일행이 비행기를 탄다는 소문이 퍼지자, '출입처와 출입처 주변'에서 연락들이 왔다. 출입처의 연락은 당연히 출입처의 장(長)과 임원들이었다. '출입처 주변'의 연락은 출입처 산하 단체나 유관 기업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이들은 여비에 보태라며 봉투들을 내놨다. 그러니까, 기자들은 출입처 '안팎'에서 낑을 챙길 수 있었다.

출입처 홍보실장의 역할 또한 빠질 수 없었다. 국내출장 때와 똑같았다. 이러저러해서 기자들이 비행기를 타게 되었으니 알고 있으라고 슬그머니 귀띔을 해준 것이다. '상급기관'의 홍보실장이 하는 귀띔은 단순한 귀띔이 아니었다. 흘려들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급기관'인 산하 단체와 유관 기업이 상급기관의 홍보실장을 감히 무시할 배짱은 없었다. 알아서 봉투들을 들고 와야 했다.

작은 돈도 모이면 큰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푼돈인 동전만으로도 커다란 벙어리저금통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작은 돈이라고 할 수 없는 10만 원짜리 봉투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봉투 10개가 모이면 순식간에 100만 원이 될 수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아예 '100달러짜리' 미국 돈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오기도 했다. 어차피 해외에서 쓸 돈이라면서 '달러'를 낑으로 보태준 것이다. 그것도 '빳빳한 달러'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빳빳한 달러를 많이들 가지고 있었다. 환전할 필요마저 덜어주는, '바람직한 낑'이 아닐 수 없었다. 기레기는 이렇게 챙긴 낑으로 1500달러를 환전해서 출국했다.

신문사의 '출장 명령'을 받고 출국했으니 마닐라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부터 취재해야 했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곳은 홍콩이었다. 먹을 것 많고, 놀기 좋다는 홍콩부터 찾은 것이다. 취재는 나중의 일이었다. 즐기는 것이 급했다.

홍콩에서 가장 먼저 한 짓은 카메라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기레기는 함께 출국한 동료 기자 2명과 함께 카메라부터 한 대씩 사서 어깨에 걸었다. '증명사진'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 같았으면 '디카'를 구입했겠지만, 당시에는 자동 카메라였다. 신문사의 사진기자가 사진 찍기 쉽고, 선명하게 잘 나온다며 추천해준 제품이었다.

기레기가 카메라를 구입하자 동료 기자들도 똑같은 카메라를 덩달아 구입했다. 이른바 '뇌동매매', 덩달아 사기였다. 덕분에 3명이 똑같은 카메라를 나란히 메고 다니게 되었다. 어쨌거나, 기래기는 카메라 사는 데 '거금' 150달러를 지출하고 말았다. 1500달러를 가지고 출국했으니 남은 돈은 1350달러로 줄어들고 있었다.

'밤에 피는 향기'를 '야래향(夜來香)'이라고 했다. 중국말로는 '예·라이·썅'이라고 발음한다. 우리말로 하면 마치 상소리처럼 들린다. 기레기 일행이 밤에 한 짓은 '향기'를 맡는 일이었다.

그럴 듯한 술집을 두 군데나 찾았다. 중국 술과 서양 술을 번갈아 퍼마셨다. '대륙'에서 건너왔다는 '파트너'도 만났다. 중국 본토 출신이라는 파트너였다. '향기'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파트너에게 제법 많은 '달러'가 지출되었다. 달러 가운데 일부는 아마도 중국본토로 송금되었을 것이었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중국 파트너는 '중공' 파트너였다. 공산 오랑캐였다. 기레기는 '적국' 파트너와 만나고 있었다. 그것도 베개를 나란히 베기도 했으니 기레기가 만약에 거물이었다면 주시를 받을 뻔했던 행동이었다.

기레기 일행이 홍콩에 도착하자 현지에 있던 출입처 유관 기업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군데나 찾았던 술집의 계산과, 숙박비는 당연히 이들이 처리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용하려고 구입한 카메라값과 파트너에게 지출한 '달러'만큼은 스스로 내야 했다. 무관의 제왕에게도 염치라는 것은 조금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결국 기레기는 수백 달러의 돈을 홍콩에서 지출했다. 기레기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출입처 등에서 내놓은 '공짜 돈'을 쓴 것이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아무래도 좀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걱정은 잠시뿐이었다. 낑이라는 것은 해외에서도 생기고 있었다. 국제회의에 참석한 출입처와 출입처 주변 사람들이 기레기 일행을 그대로 두지 않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함께 하자고 해서 식당에 가면 봉투를 내놨다. 저녁식사를 하자고 연락이 오면 또 봉투였다. 봉투 속에는 모두 달러가 들어 있었다. 역시 '빳빳한 달러'였다. 얄팍해졌던 지갑은 어느새 다시 두툼해지고 있었다. 그것도 '달러'로 가득 차고 있었다.


<이 글은 도서출판 지식공방에서 펴낸 저서 '촌지'를 약간 수정, 보완해서 재록하는 것입니다>

김영인  belly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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