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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칼럼] 백두산 호랑이라고?
  • 이정선 기자
  • 승인 2018.05.11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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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벌판에 엄청나게 넓은 숲이 있었다. 그곳에는 온통 나무뿐이었다. 며칠 동안을 걸어도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도끼 자국조차 없는 ‘처녀림’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이 삼림을 ‘수해(樹海)’라고 불렀다. ‘나무바다’라는 뜻이다. 삼림이 너무 넓고 깊어서 마치 바다처럼 푸르기 때문에 ‘수해’였다.

수해는 대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우거진 숲이 햇빛마저 차단했기 때문이다. 수해 속을 걸으면 마치 바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나무바다’였다.

수해는 평평했다. 산이 없는 벌판이기 때문에 사냥꾼이 짐승을 잡으려고 총을 쏴도 총소리가 반사되지 않았다. 메아리가 울리지 않을 정도로 평평한 곳이 수해였다.

중국 사람들은 수해라고 불렀지만,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우리 고어(古語)에 삼림을 갓 혹은 가시라 하니… 수천리 무제(無際)의 삼림해(森林海)를 이룬 고로 ‘가시라’라 칭하니, 가시라는 삼림국(森林國)이라는 뜻이다.”

신채호는 또 “가시라를 옥저(沃沮)라 기(記)한 바, 옥저는 와지의 역(譯)이요, 와지는 만주어의 삼림이니…”라고 했다.

만주 벌판의 넓은 삼림은 우리 역사에 나오는 옥저였던 것이다. 신채호는 그 옥저를 오늘날의 함경도 부근인 ‘남옥저’와 두만강 건너의 ‘북옥저’로 구분했다.

이 옥저의 주인이 ‘조선 호랑이’였다. 조선 호랑이는 바다처럼 넓은 숲을 누비며 주인노릇을 했다. 조선 호랑이에게는 적이 없었다. 언제나 당당하게 활보했다. 그 넓은 곳에 사람이 모여서 살아봐야 그야말로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연암 박지원도 그 호랑이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글이다.

박지원이 만주 땅에서 밤을 맞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30여 군데에 횃불을 켜놓았다. 아름드리 되는 나무를 베어다가 먼동이 틀 때까지 환하게 밝혔다. 군뇌가 나팔을 한번 불면(軍牢吹角一聲), 300여 명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밤새도록 외쳤다. 호랑이를 경비하기 위한 것이었다(所以警虎也).

만주 벌판에는 호랑이가 이렇게 많았다. 밤새도록 횃불을 밝히고 시끄러운 소리를 질러야 호랑이가 접근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조선 말 우리나라를 여행한 영국 할머니 이사벨라 비숍도 이렇게 썼다.

“…호랑이와 귀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밤에는 거의 여행하지 않는다. 야행을 할 경우 길손들은 보통 몇몇이 서로 끈으로 묶고, 등롱을 밝히고, 횃불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고, 꽹가리를 치며 길을 간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조선 호랑이가 공포의 대상이면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조선 호랑이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그만큼 무서워했다.

조선 호랑이는 이마에 ‘임금 왕’자가 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조선 호랑이를 ‘왕대(王大)’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 발음으로는 ‘왕따’다.

그랬던 조선 호랑이가 오그라들고 있다. 광활했던 활동 영역을 잃고 이름마저 ‘백두산 호랑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구려와 발해 때 만주 벌판에서 국력을 떨쳤던 우리 민족과 닮은꼴이다.

경북 봉화의 축구장 7개 면적이나 된다는 ‘호랑이 숲’에 방사했다는 호랑이도 ‘백두산 호랑이’일 뿐이다. 조선 호랑이는 없어진 것이다.

이정선 기자  jslee@sat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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