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 이야기] <15> 놀러 다니는 해외 취재
[촌지 이야기] <15> 놀러 다니는 해외 취재
  • 김영인
  • 승인 2018.05.10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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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외취재 때는 어리벙벙했던 기레기였다. 그래도 그럭저럭 외국 구경을 몇 차례 할 수 있었다. 그런 기레기에게 해외출장의 기회가 또 왔다.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를 취재하게 된 것이다.

기레기는 더 이상 데스크 앞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답답한 기자' 소리를 듣지도 않게 되었다. 그 사이에 붙은 이력 덕분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중요했다. 사람은 배우면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레기는 해외출장 품의서부터 작성했다. '출장 경비' 난에는 '없을 무(無)'를 자랑스럽게(?) 자발적으로 기입해 넣었다. 데스크에게 배운 솜씨였다.

그까짓 출장비쯤이야 문제될 것 없었다. 충분했다. 오히려 넘칠 것이 분명했다. 품의서를 작성하는 데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품의서가 좀 희한했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곳은 마닐라라고 했다. 그렇다면 품의서에 기입된 '출장지역'은 필리핀 한 곳뿐이어야 했다. 상식적으로 따지면 그래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품의서에는 필리핀 외에도 여러 나라가 적혀 있었다. 홍콩, 태국, 대만, 일본 등이 더 적혀 있었다.

출입처에서 만들어준 '해외취재 협조공문'에도 출장지역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기레기는 국제회의가 열리는 마닐라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갈 작정이었다. 출입처 역시 기레기 일행에게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줄 생각인 것 같았다.

어째서 다른 나라까지 돌아보겠다는 것일까. 출장을 가는 김에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모처럼의 출장 기회를 보다 즐기기 위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렇게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야 주머니가 두둑해지기 때문일까.

그런데, 출장을 허락해주는 신문사도 희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자가 출장 목적지 외에 다른 여러 나라를 더 구경하고 오겠다고 결재를 올렸다면 '퇴짜'를 놓는 게 아마도 정상이었다. 기자가 밖으로 나도는 동안에는 그만큼 신문사 일을 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신문사의 인력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었다. 기레기는 출장 기간 동안 자리를 비워야 했다. 그 사이에 발표자료라도 나오면 다른 기자가 대신 처리해줘야 했다. 다른 기자가 기레기의 출입처를 대신 맡아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문사는 신문을 제작하는 데 약간이라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신문사로서는 손해가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신문사는 기레기가 품의한 그대로 출장을 허락해주고 있었다.

출장비 문제도 그랬다. 기자가 외국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를 '취재'하는 경우, 기사를 몇 건 정도는 써야 했다. 하다못해 국제회의가 어디에서 며칠 동안의 일정으로 개막되었다는 속칭 '개막 기사'와 우리측 대표의 '연설 기사' 정도는 써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자는 본연의 업무인 '기사 쓰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해외출장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문사는 '일'을 하러 가는 기자에게 출장비를 한 푼도 주지 않는 것이다. 출장비는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기레기 또한 출장비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출장비란 으레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품의서를 작성할 때 '출장 경비' 난에 아예 '없을 무'를 알아서(?) 기입했던 것이다.

기자 '본연의 업무'인 기사 쓰는 일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희한했다. 국제회의라면 적어도 '영어'로 진행될 것이었다. 그러니 영어회화가 서툰 기자는 취재 자체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머나먼 외국에 '취재원'이 있을 리도 없었다. 말 안 통하고, 낯선 곳에서 취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면 기사를 쓸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머나먼 외국에는 신문사의 '특파원'도 파견되어 있었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마닐라에는 특파원이 없었지만, 가까운 홍콩 특파원이 마닐라로 건너가서 취재하도록 할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특파원의 영어회화 실력이 기레기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특파원의 실력이라면, 현지에 취재원이 없더라도 영어로 더듬더듬 취재를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기레기는 당당하게 해외취재를 가겠다고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신문사는 이를 허락하고 있었다. 또한, 출입처에서는 취재 능력이 없는 기자를 해외취재에 초청하고 있었다. 그것도 경비까지 모두 부담해가면서 초청한다고 했다. 이래저래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기레기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기사를 미리 써놓고 출국하는 것이다. 국제회의가 마닐라에서 며칠 동안 열리고, 회의 안건이 무엇이고, 참석자가 누구라는 정도는 미리 보도자료로 나와 있었다. 그것을 기사로 써놓으면 그만이었다.

우리측 대표의 연설문도 마찬가지였다.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기사로 옮기면 되었다. 영어로 작성된 연설문은 마닐라에서나 필요할 뿐이었다. 대한민국의 기자에게는 우리말로 작성된 연설문을 보도자료로 배포하고, 기자는 그 자료를 가지고 기사를 미리 써놓는 것이다.

기사를 미리 써놓고 출국하고 나면, 결국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자가 할 일이란 오로지 먹고 놀고, 즐기는 것뿐이었다.

기자랍시고 회의장에 얼굴 한번 내비칠 필요조차 없었다. 어쩌다가 상황이 달라져서 현지에서 보도자료가 나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럴 경우, 기사를 간단히 몇 줄 긁어서 국제전화로 신문사에 송고하면 그만이었다. 국제전화 요금을 한 푼도 물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쉽게 말하면 놀러가는 것이 해외취재였다. 그렇다고, 신문사는 놀러 다닌 날짜만큼 기자의 봉급을 깎지도 않았다. 비록 출장비는 지급하지 않지만 봉급만큼은 에누리 없이 지급한 것이다. 기자에게는 신나는 출장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글은 도서출판 지식공방에서 펴낸 저서 '촌지'를 약간 수정, 보완해서 재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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