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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 이야기] <14> '서양 미녀'와 찍은 사진
  • 김영인
  • 승인 2018.05.08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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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가 '올챙이 기자'였던 시절이었다. 선배 기자가 사진관에서 막 찾아온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사진이 무척 많았다. 적어도 몇 백 장은 될 것 같았다. 앨범 한 권 정도는 가볍게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은 사진이었다. 당시에는 '디카'라는 것이 없었다. 그랬으니 필름값만 따져봐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었다.

사진의 배경은 모두 '외국'이었다. 선배 기자는 '해외출장'을 다녀오고 있었다. 따라서 선배 기자의 사진은 바다를 건너가서 외국 구경을 하고 왔다는 '증명사진'이었다.

외국이란 곳을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운 좋게 '해외출장'을 가면 '증명사진' 찍는 게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선배 기자는 그 좋다는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사진부터 찾아왔던 것이다.

선배 기자는 기레기에게 사진을 한 장씩 보여주면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서양 여자'와 나란히 붙어 앉아서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있었다. 선배 기자는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초'까지 듬뿍 치고 있었다.

'초'는 은어다. 기자들 사회에서는 기사를 과장해서 쓰는 것을 '초를 친다'고 표현한다. 선배 기자는 과장된 기사를 쓰듯,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만나서 무슨 짓을 했던 여자라며 한참동안 '초'를 치고 있었다. "자네도 곧 밖에 나갈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격려 비슷한 말도 덧붙이고 있었다. 기레기는 그런 선배가 무척 부러웠다.

그랬던 기레기에게도 마침내 '해외출장'의 기회가 생겼다. 출입처에서 출입 기자들의 '해외취재'를 추진한 것이다. 물론 출입 기자들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 해외취재를 보내주기로 한 것이지, 자발적으로 보내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출입처에서는 기레기에게 '해외취재 협조의 건'이라는 공문을 건네줬다.

"귀 신문사의 기레기 기자를 ×월 ×일부터 ×월 ×일까지 ××일 동안 유럽 현지 취재에 동행하고자 하오니,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기레기는 신문사 데스크에 달려가 보고했다. 공문을 데스크에게 디밀었다.

데스크가 물었다.

"처음 나가는 건가?"

"예, 해외출장은 처음입니다."

데스크가 또 말했다.

"코스가 제법 좋은데…. 어디 보자.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빨리 품의서 작성해서 제출해."

'해외출장 품의서'는 대단히 쓰기가 어려웠다. 기레기는 기사를 쓰는 게 직업이라 글 쓰는 것만큼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품의서를 쓰다보니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다름 아닌 '출장 경비' 부분이었다. 기레기는 출장 경비를 얼마라고 기입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매다가 결국 데스크에게 물었다.

"출장 경비를 얼마라고 써야합니까."

데스크는 답답하다는 듯 기레기에게 말했다.

"품의서 이리 가져와."

품의서를 넘겨받은 데스크는 '출장 경비 난'에 "없을 무(無)"를 기입해 넣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출장 준비나 잘해."

기레기는 얼떨떨했다. 해외출장은 아무래도 국내출장과는 다를 듯싶었다. 그동안 이곳저곳 출장을 다녀본 경험에 의하면, 국내출장은 수틀리면 버스를 타고 돌아와도 그만이다. 그렇지만 해외출장은 반드시 비행기를 타야 할 것이었다. 그 먼 곳에서 배를 타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신문사에서 적어도 '비행기표 값'은 지급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신문사는 돈 한푼 대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출장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것도 선심이라도 쓰듯 말이다.

기레기는 당황했다. 귀밑까지 찢어졌던 입이 다물어졌다. 데스크에게 다시 물었다.

"저기…, 출장 경비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데스크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이봐, 기자가 왜 그렇게 답답해. 출입처에서 알아서 해줄 거야."

과연 그럴까 했다. 그랬는데 과연 그랬다. 출장비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출입처에서 기레기에게 출장비를 지급한 것이다. 출입처의 '부장급 직원에 해당하는 여비'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지급해주고 있었다. '몇 박 몇 일'이라는 날짜 계산까지 틀리지 않고 있었다. 비행기표는 함께 가는 기자들 것까지 일괄 예매해준다고 했다. 그러니 기레기는 자기 돈이나 회사 돈을 한푼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출입처에서 받은 출장비는 십여 일 동안이나 유럽을 구경할 경비라서 그런지 상당히 두툼했다. 더구나 말단직원이 아닌, 출입처의 부장급 직원에 해당하는 여비였으니 '피라미 기자'를 갓 넘긴 기레기에게는 간단치 않은 금액이었다.

기자생활을 오래 한 데스크는 과연 달랐다. 데스크의 말처럼 기레기는 답답한 기자였다. 제 아무리 해외출장이라고 해도 여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은 도서출판 지식공방에서 펴낸 저서 '촌지'를 약간 수정, 보완해서 재록하는 것입니다>

김영인  belly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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