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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칼럼] 연암 박지원의 ‘오미자 봉변’
  • 이정선 기자
  • 승인 2018.04.1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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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출장’ 중이던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 앞에 어떤 절 하나가 나타났다. 스님이 달랑 2명뿐인 조그만 절이었다.

들어가 보니 뜰에 오미자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햇볕에 말리려고 펴놓은 오미자였다. 박지원은 무심코 그 오미자 몇 알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러자 스님 한 명이 갑자기 박지원에게 고함을 질렀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욕설인 게 분명했다. 박지원은 졸지에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박지원은 중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 뭐라고 변명을 할 재간도 없었다.

마침 ‘춘택’이라는 말몰이꾼이 담뱃불을 붙이려고 절 안에 들어왔다. 춘택은 대뜸 스님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중국어와 조선어를 섞은 말이었다.

“우리 어른께서 더운 날씨에 갈증을 느껴 이 많은 오미자 가운데 단지 몇 알 씹으며 갈증을 잊으려 하는데, 이 중대가리야, 너는 양심도 없는가. …당나귀처럼 높고 낮은 것도 분별하지 못하고, 천하고 귀한 것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무례를 범하는구나.”

춘택은 자신이 조선에서 온 사신이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했다. 스님에게 신분을 과시해 겁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어른께서 이 사실을 만세야(萬歲爺·황제)에게 고하면, 너 같은 도적놈의 머리를 쪼개버리든지, 아니면 이 절간을 짓밟아 평지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춘택이 스님에게 삿대질을 하는데도 다른 스님 한 명은 그 옆에서 웃고 있었다. 그들의 속셈은 뻔했다. ‘청심원(淸心元)’을 달라는 것이었다.

조선 사신 일행이 가끔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는 절이었다. 그들은 박지원이 절에 들어올 때 이미 조선의 명약인 청심원을 얻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이날의 사건을 ‘열하일기’에 기록했다.

“옛 성인들은 사양하는 것과 받는 것, 취하는 것과 주는 것을 신중하게 하고, 삼가며 행동했다. 따라서 의롭지 않다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말고, 받지도 말라고 했다. 이제 오미자로 인해 발생한 일을 겪고 나니 지푸라기 하나에 대한 성인들의 이야기가 과연 심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학문이 얕아서 정관납리(整冠納履)의 오해를 사는데 삼가지 못했다. 스스로 오미자를 훔쳐 먹었다는 치욕을 입게 되었다.”

‘정관납리’는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바로 하고, 오이밭에서 신발 끈 고쳐 매는 것을 말한다. 허락 없이 오미자 몇 알을 입에 댔던 사실을 ‘정관납리’라며 반성했던 것이다.

박지원은 오늘날의 어떤 높은 사람과 달랐다. 이 높은 공직자는 국회의원 시절 ‘피감기관’의 돈으로 해외시찰 또는 외국 여행을 다녀왔다는 보도다. 보도에 따르면 여러 차례였다. 그 비용이 적지 않았다. 여비서와 동행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 바람에 정치판이 떠들썩하고, 시민단체까지 발끈하고 있다.

그런데, 고위공직자는 “업무와 상관없는 로비성 외유는 전혀 아니다”고 해명하고 있었다. “국민 눈높이에서 지적받을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죄송하다”고 밝히고 있었다.

‘반성한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고 있었다. “19대 국회까지는 관행적으로 이뤄졌던 부분”이라며 “관행이었다고 해도 스스로 깊이 반성한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미자 몇 알’을 가지고도 뉘우쳤던 박지원의 반성과는 좀 다른 듯싶어 보였다.

이정선 기자  belly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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