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 이야기] <1> 무관의 제왕 고스톱은 '점 만' 짜리
[촌지 이야기] <1> 무관의 제왕 고스톱은 '점 만' 짜리
  • 김영인
  • 승인 2018.03.0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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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년 초겨울.

금융기관의 버스 한 대가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가는 버스다. 주말이지만 날씨 탓인지 교통량은 많지 않은 편이다.

버스는 대형이지만, 탑승자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탑승자의 직업은 똑같다. 모두 기자다. 금융 담당 기자다. 그러니까 한국은행 출입기자다.

기자들은 '지방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금융기관의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물론 요금이나 이용료 따위는 없다. 공짜다. 그 정도 편의를 거부할 만큼 용감한 금융기관은 없다. 기자는 '무관의 제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자들의 표정이 희한하다. 하나같이 피곤한 얼굴이다. 밤새도록 술들을 마셔대고, 여성 '파트너'와 엉뚱한 짓까지 한 기자도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몇몇 기자는 아예 좌석에 누워버린 상태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잠이 든 기자도 있다.

그렇지만 서너 명은 예외다. 얼굴은 다른 기자들과 똑같이 피곤하게 보이지만, 눈초리만큼은 날카롭다. 살기마저 등등하다. 이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여 있다. 둥그렇게 모여서 앉아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돈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화투장도 보인다. 이들은 고스톱을 치고 있는 것이다. 언제 준비했는지, 화투판 '대용'으로 사용하는 포장박스 위에는 담요도 깔려 있다. 버스가 가끔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럴 듯한 '도박판'이다.

고스톱판에 쌓여 있는 돈이 심상치 않다. 대충 봐도 모두 빳빳한 돈뿐이다. 은행 창구를 방금 빠져나온 신권이다. 그것도 만 원짜리가 거의 전부다. 5만 원짜리 고액권은 없었던 시절이라 만 원짜리 돈이다.

수표도 여러 장 있다. 천 원짜리 돈은 몇 장 안 된다. 작지 않은 판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지금 '점 천' 짜리 고스톱을 하고 있다.

부산을 떠난 버스가 대전을 통과하자 쌓이는 돈은 더욱 많아진다. '피박'을 씌우고, '흔들고', '쓰리 고'를 외쳐대면서 지갑에서 빠져나오는 돈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열심히 돈을 꺼내고 있다.

꺼내는 돈은 역시 모두 빳빳하다. 모조리 신권이다. 마치 헌 돈은 쓰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어떤 기자는 지갑이 아니라, '하얀 봉투'에서 빳빳한 돈을 꺼낸다. 도대체 무슨 봉투일까.

마침내 버스가 수원을 통과하고 있다. 서울까지 얼마 안 남았다. 고스톱이란 돈을 따기 위해서 치는 것이다. 서로들 마음이 급해지고 있다. 돈을 잃은 기자는 더욱 다급해지고 있다.

한 기자가 '긴급제안'을 한다.

"이제 서울까지 한 시간 남짓이다. 한 명한테 몰아주자. '쩜 만'으로 올리자."

그까짓 것 해보자며 동의한다. 판은 급격하게 커진다. '점 당 만 원'인 만만치 않은 판으로 불어난다.

'기본'인 3점만 잃어도 3만 원이다. '피박'을 쓰면 곱빼기다. 몇 십만 원이나 되는 돈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모인다. 정신들을 바짝 차린다. 잠을 자거나, 쉬고 있던 기자들도 몰려들어 구경을 한다. 큰판은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미 창 밖은 캄캄하다. 버스 옆을 스쳐 가는 차들이 고스톱 치는 내부를 훤하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자는 무관의 제왕이다. 아랑곳없다. '점 만' 짜리 고스톱을 친다고 감히 시비를 걸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아마도 힘들다. 경찰서장이 지나가다 봐도 모른 척할 것이다.

버스가 그럭저럭 한국은행 앞에 도착한다. 모두 내린다. 몇몇 기자는 또 한 잔씩 하러 가지만, 대부분 집으로 돌아간다. 기자도 사람인 이상 좀 쉬어야 하는 것이다. 기자들은 이렇게 '지방취재'를 마친다.

<이 글은 도서출판 지식공방에서 펴낸 '촌지'를 약간 수정, 보완해서 재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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